1994년 6월 10일 오전 11시 23분 경, 서울지하철 1호선 북쪽 종착역인 의정부북부 역 근처 마을에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졸업 스탠다드 푸들 견종

안내견 동승 시각장애 대졸자 임현승 씨(26)와 그의 옆 친구 대졸자 2명이서 이사온 뒤 짐을 꺼내 정리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월 14일 날 저녁 6시 30분 저기 역 근처 고깃집에서 한 대졸자 정현길 씨(26)가 그들이 데리고 간 안내견 앞에 다가가서는 우리 식당을 운영하던

자기네 어머니가 자기 구역 내에 안내견을 동승 반입하여 밥 먹는 것을 허락한다고 얘기를 하여 자기 고깃집 식당 문 앞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때부터 그들은 고깃집 식당 안에서 안내견을 동승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으며 10월 27일 때까지 자주 안내견을 데리고  들락날락 방문하여

동승 반입하기를 반복하며 점심 저녁식사를 해결해왔다.

그 때문에 기간 동안 손님들이 자꾸 안내견을 보고 혐오하며 돈을 내고 식당 밖을 빠져나오려거나 털과 체액이 바지에 묻혀서 화가 난 손님들이

돈 안내고 밖을 빠져나오려고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식당 안에서 알바 일을 하던 그 대졸자가 나중에 10월 27일 날 저녁 7시 10분경 그들이 안내견 데리고 자기 식당 안에 반입하려는 걸 막아서고

우리 같이 의정부북부역 선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러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같이 의정부북부역 선로 앞으로 걸어가 산책을 하러 나섰다.

그러다가 그들 중 2명의 안내견 신봉 대졸자들이 주변에서 전철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안내견을 수용하다 거절한

한 대졸자 친구를 뒤로 밀쳐 깔려 죽게 한 뒤 멀리서 도망쳤다.

그 안내견 신봉 대졸자 두 명 중 한 명은 열렬한 김대중 대통령 신봉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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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 경기도 동두천시 동안동의 한 북쪽 마을인데 나중에 자신의 친부모끼리 다투는 걸 목격하고

이혼한 뒤 친엄마 밑에서 자라나다 계부와 재혼 후 10살 때부터 강제로 집 밖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며 구걸하다 나중에 동두천시 보산동의 한 미군 부대 유흥가를 주선하던

직업소개소 일당의 도움으로 먹을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돈 벌어먹을 수 있어서 

그 주변 인근 상점에서 파는 식량과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다가 6.25 전쟁 참전 도중 포탄과 지뢰 폭발로 양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 착용하고 무리한 군 복무를 시행하다

의족이 계속 부러지며 죽을 뻔하여 살아남다 심각한 연극성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미 육군 중령

제임스 하웰드(33)씨와 만나게 되면서 그 장교가 거주하던 호화스러운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다 사악한 모습으로 돌변한 미군 장교한테 끌려가 독방에 갇힌 채

밧줄로 목졸려 강제로 팬티를 벗김당하거나 그가 들고 있던 군용칼과 식칼에 자신의 생식기가 꽂혀

고통스럽게 찔리는 일을 자주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10대 초반이 되면 그 장교한테서 끌려가 방 안에서 강간당한 후 3개월 임신을 하면 

강제로 사탄주의 역오망성 그려진 곳에 끌려가 밧줄에 손과 발이 묶이고 얼굴 감싼 채 목을 묶으며

자신의 유방 주위와 배가 칼로 도려져 지팡이로 여러 번 폭행당하고 감금되어 왔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의 뱃속에 있던 어린 아이를 낳으면 낳을 수록 그 미군 중령한테서 입양기관을 소개받고

다른 곳으로 입양보내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자는 속삭임에 넘어가 잠시 아이를 맡기다가 다리가 잘린 채

살해당한 채 버려지게 되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자기 눈에 쓰레기봉투에 싸매인 자기 친자식의 

토막난 시체를 보자마자 놀랐다고...

그러다가 20대 때부터 보산동의 술집으로 일하며 미군들을 위안하는 위안부로 지내다가 우연히 술집에서 발견된

서비스견을 보았다. 

그렇게 하네스에 적혀 있는 No pet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무심코 함부로 쓰다듬고 만지다가 나중에 그 서비스견 주인인

시각장애인 미군 대위 제퍼슨 A 엠브런트 씨(26)와 만났다.

그렇게 해서 그 미군 대위와 2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서 60만 달러의 돈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 안에서 그 서비스견 동승 부상 장교가 여러 부하 미군들과 합세하여 그녀를 붙잡아 집단폭행시키고

밧줄로 손발을 묶고 서비스견 입으로 생식기 핥으며 성관계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 젊은 여성 위안부를 지팡이와 각목으로 폭행하고 서비스견과 강제로 섹스하게 만들고

저녁 8시가 되면 동두천시 보산동의 한 술집으로 끌고 가 미군들과 강제 성관계시키면서 스토킹질하고

그 곳에서 일하던 성매매 업주들과 같은 동료 여성 점원(위안부)들을 모조리 납치해 죽이고 술집 주변 들판에 버렸다.

이 짓을 그 미군 위안부 한 명이 30세로 자라날 때까지 반복해서 해먹다가 군사경찰들한테 발각되어 대규모로

체포 이송되었다.

만약에 자신이 장애를 가진 미군들한테 학대를 당했다고 다른 미군들에게 토로하면 주변 미군들이 화가 나 가지고

어딜 감히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리를 잃은 부관님한테 이따구로 그런 소리를 해라는 식으로 풀발기하며

집단폭행을 저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두천시 보산동의 한 술집에서 5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하며 억대의 돈을 많이 벌고 위안부 포주들의

배려를 받아 의정부북부역 부근의 호화 주택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 억대로 번 돈을 쓰고 훨씬 남은 돈으로 호화 승용차를 구매한 뒤 온 마을 상가들을 다 두루 다니며 유흥업소들과

식당들을 많이 세우고 아파트까지도 재개발하였다. 그렇게 할 정도로 그녀는 엄청난 재산과 돈을 가진 부자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을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 때 받은 상이미군의 연이은 폭력과

가학적인 성폭력 강간에 관한 트라우마에 자주 시달려 자살 시도와 자해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본가 생활을 이어가다 나중에 휴가 나온 국군 장병들을 만나 대화를 하다

나중에 군 복무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놈들도 오래 전 미군들이 전장에 나가다 다리를 잃고 나를 학대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게 될 것이라는 나쁜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가능동 주변에 미군 기지에서 일하다 잠시 퇴근한

미군들이 대화를 나눈다 싶으면 아예 낯을 피하고 멀리 자기 집으로 도망갔다.

그러다가 혼자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정신과 약을 먹다 결국 국군들과 미군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이유로 박카스와 주스 음료를 잔뜩 사들인 뒤 기타 화학약품을 밀수해들여 독을 타내었다.

1992년 2월 25일부터 1995년 1월 18일까지 18명의 젊은 국군 장병들을 자기 집으로 방문 허가한 뒤 독에 탄 음료를

접대하여 독살시키고 가능동 부근 미군기지에서 근무하던 일부 기독교인 미군들까지 독이 탄 음료를 건네며 독살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경찰과 주한미군과 육군의 합동 수사 끝에 체포되어 살인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의정부 교도소에 1년 복무한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나이 때가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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